작성일
2014.11.04
수정일
2014.11.04
작성자
옥지훈
조회수
563

하계 연구실 단합대회, 2003


2003 하계연구실 단합대회



달리 비가 많이 왔던 올해 여름, 후덥지근하고 꿉꿉하던 생활에 지쳐갈 때쯤에, 교수님의 주선으로 1박2일간의‘지리산 MT’를 가게 되었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미리 실험실에 들어갔던 나로서는 교수님, 그리고 실험실 형들과의 첫 엠티인지라 긴장 반, 기대 반으로 따라 나서게 되었다.

 

  첫쨋 날...


오래간만에 기분좋게 맑은 하늘을 보며, 마침 부산대학교에 와 계셨던 Fukasawa 교수님께서도 같이, 우리는 세대의 차에 나눠 타고 기분 좋게 부산을 출발했다. 아마도 중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갔었을 테지만 전~혀 기억에 없는지라 내게 지리산행은 처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한참을 달려 슬슬 배가 고파 올쯤에 '하동'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하동하면 생각나는‘제첩국’. 평소에 제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나였지만, 어찌나 입맛이 돌던지 제첩회무침이랑 제첩국과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기분 좋게 부른 배를 두드리며 서서히 지리산 국립공원 내에 들어섰다. 자동차 CF에서 보았던 굽이굽이 구부러져 올라가는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올라,‘정령치’를 지나‘노고단’에 올랐다. 지리산 제1봉‘천왕봉’에는, 짧은 1박2일의 여정으로 오르지는 못했으나 그에 못지않게 노고단 역시 가슴속 답답함을 씻어주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일명‘고선봉’으로 불리는 노고단은 완만한 경사지대로 대략 35만평 규모의 고원지대이다. 노고단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 하고 또한 화랑들의 심신수련장으로 활용되었다 한다. 그 후 일제 시대엔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으로 둔갑하기도 하였고, 그 별장들  이 이후 1248년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들의 근거지로 사용되었다가 국군에 의해 불태워 지면서  노고단 일대 수목들까지 불태워져 지금도 큰 수목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 잡고 있는데 비해서‘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 했다. 실상사는 신란 흥덕왕 3년에 당나라에 유학한‘증각 대사’가 창건한 호국 사찰로 신라 구산선종 중 최초의 사찰로‘도선 국사’의 풍수설에 의하여, 우리나라 땅의 정기가 지리산 청왕봉을 거쳐 일본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실상사에 4천근이 되는 약사여래불을 봉안하였고, 지맥을 막기 위해 5층 목탑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하고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한다”는 전설과 보광전 법당의 범종에는 일본지도가 그려져 있어 조석으로 그곳을 쳐서 일본침략을 저지하려는 뜻이 깃들어 있는 호국기원 사찰이다.

   

 

다음날 갔던‘화엄사’에 비해 그 규모는 작았지만 단아하고 정갈한 느낌의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교수님 말씀대로 실상사의 타종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듣지 못한 체 우리는 일박할 숙소를 향하였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다시 모여 간단히 술잔을 기울이여 교수님 두 분과 담소를 나눈 뒤 그렇게 지리산의 첫날이 저물었다.

 

둘쨋 날...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지리산의 쾌청한 아침공기를 깊이 들이쉬며‘화엄사’를 향했다. 방학을 맞아 단체로 학생들이 관람을 왔고 많은 사람들이 화엄사를 찾았다.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에 인도에서 온‘연기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고 절의 이름은‘화엄경’의‘화엄’두 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억불정책을 썼던 조선시대에도 성황을 이루었다.  할 만큼 손꼽히는 사찰이다.

 

          

 

과연 그 규모가 매우 크고 웅장한 건물과, 사찰을 둘러싼 지리산의 산세가 매우 아름다웠다. 천년이 넘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라보아 온 그 웅장함에 절로 숙연해 짐을 느꼈다. ‘실상사’가 어머니 같은 느낌의 사찰이었다면‘화엄사’는 아버지와 같은 느낌의 사찰이었다.

 

    

    

 

화엄사를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춘향전’의 무대‘남원 광한루’로 향했다. 이제는 춘향전의 로멘스에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할 만큼 커버린 나였지만 광한루의 아름다움은 인상적이었다.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관광객을 위해 많이 개발되었듯이 광한루 역시 관광객을 위한 많은 볼거리를 마련해 놓았었다. 과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외국인 단체 관광객도 보였다. 복원해 놓은 춘향이 생가라든지 우리 전통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 놓았고 춘향이가 타던 그네도, 연못 가운데 자리한‘광한루’의 모습도 많은 사람의 사진 속에, 마음속에 남겨지고 있었다.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비와 함께 우리의 짧았지만 기억에 남을 여행은 막을 내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짧은 시간동안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왔었던 것 같다. 다만 일정이 촉박한 지라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지만... 해외여행을 즐기고 선호하는 시대고 나 또한 그러하지만 새삼 일부나마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고, 해외여행도 좋지만 이렇듯 아름다운 우리나라에 아직도 내가 모르고, 가보지 못한 곳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교수님 아드님이 가져온 축구공으로 근처 학교 운동장에 가서 축구도 하고 같이 여행하면서, 아직 들어간 지 얼마 안돼 조금은 쑥쑥한 나로서는 교수님 그리고 형들과 좀더 가까워 질수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교수님 덕에 매 식사 때 마다 맛본 각 지방의 음식 맛은 지금도 군침이 돌게 한다. ^^.


하계 연구실 단합대회, 2003 A_A_2003 m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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